2016.02.03
[ESSAY] 내 고향 북한의 설
20년전 부활한 북한의 설… 그곳에선 떡국이 정말 고급음식
고향 부모님 세배는 언감생심… 안부도 교환 통해 공중전화로
하루빨리 분단 고통 마무리하고 북녘서도 더 따뜻한 새해 맞기를
지난 주말 열 살 난 막둥이 손을 잡고 집 근처 대형 마트를 찾았다. 며칠 뒤 강원도 어느 스키장에 가기 위해 필요한 준비품을 사기 위해서다. 경기 침체라지만 그래도 설이 가까이 와서인지 넓은 주차장에는 쇼핑을 나온 고객들이 세워놓은 다양한 승용차가 평소보다 더 많이 들어찼다.
‘없는 것 빼고는 모두 다 있다’는 마트 안에서 갖가지 상품을 고르며 북새통을 이룬 고객들의 표정에도 명절에 대한 기대로 미소가 잔뜩 어렸다. 부모 손 잡고 나온 아이들은 무엇을 사달라며 행복한 비명을 지르기도 한다. 아무튼 나라에 돈이 있어야 국민도 잘살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높아야 명절도 기다려지는 법이다. 행복에 겨운 아들과 즐거운 쇼핑을 하면서 고향 생각에 잠겼다.
북한에서 설은 지난 1960년대 김일성의 ‘시대에 맞지 않는 봉건적 잔재’라는 교시로 청산됐다가 90년대 초반 김정일의 지시로 ‘민족 전통문화를 장려하는 차원’에서 부활했다. 초기에는 하루만 쉬다가 요즘은 이틀을 쉰다. 첫날은 아침 일찍 김일성·김정일 동상을 찾아 절을 한 후 각자 소속된 조직과 단체별로 정치 학습과 강연 및 문화 행사를 갖는다. 다음 날은 가족이나 이웃과 함께 공원과 극장 등을 찾아 유희를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일반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노래방, 커피숍, PC방 등 문화 시설은 전혀 없다.
조상의 묘소를 찾아 만복기원의 절을 올리고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부모님께 세배를 드리며 덕담을 나눔에서부터 씨름과 윷놀이, 장기와 바둑 등 우리 민족의 고유 민속놀이는 남한과 똑같다. 재롱떠는 아이들의 손목을 잡고 동네 강변에서 하는 제기차기와 술래잡기, 썰매 타기와 눈싸움도 별 다름없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차이점이 있다. 먹을 것이 흔한 남한에서 설날 아침 으레 마주하는 민속 음식인 떡국은 북한의 일반 주민들에는 정말 고급 음식이다. 서울에서 생일에 먹는 미역국도 평양에서는 임신부가 출산 후 먹는 대표 음식이다.
모든 것이 국가 배급제인 북한에서는 설날 상점과 식당에서 주민들이 흥청거리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TV에 비치는 평양의 연출된 모습은 오직 그들만의 소왕국에서 존재하는 이색적 그림이다. 솔직히 말해, 산 사람이 먹을 음식도 제대로 없는 실정이니 죽은 조상님께 드릴 차례상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김정은 시대 들어서도 계속되는 국가의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노동자들에게 월급도 제대로 못 주는 형국이니 아이들에게 주는 세뱃돈도 거의 전무하다. 북한 조선중앙은행의 각 저금소(지점)는 입금만 되고 출금은 전혀 안 된다. 세상에 뭐 그런 곳도 있느냐는 의문이 가겠지만 여하튼 북한은 그런 곳이다.
북한에선 남한처럼 자가용을 타고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을 찾아 세배 드리는 풍경을 볼 수 없다. 친인척 중에 관혼상제가 있을 때만 정부의 승인을 받고 지역을 벗어나는 북한 주민들이다. 설령 평양에서 청진을 기차로 간다고 해도 빠르면 하루 이틀, 늦으면 1주일 이상 걸린다. 그렇다고 가정용 전화로 안부를 묻는 것도 아니다. 당과 국가의 고위간부들 집에는 전화가 있지만 일반 주민들이 사는 아파트에는 경비실에 한 대 있을 정도이며 시내 공중전화도 교환이 연결해준다. 휴대전화 구입비는 일반 주민들의 100년 월급과 맞먹는 꿈도 꾸지 못할 엄청난 부의 상징이다.
명절도 아닌 주말에 설날 풍경을 미리 앞당겨 만끽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손에 쥔 작은 휴대폰으로 빠르게 변하는 지구촌 곳곳은 물론이요 세상 사람들이 사는 다양한 모습까지 환히 들여다보며 웃음 가득한 아들의 행복한 모습에 도취한 내가 북한의 총리나 장관보다 훨씬 더 낫지 않을까. 그들도 없는 자가용을 타고 다니며 외국은 물론 국내 어디든 아무 때나 다닐 수 있는 풍족한 자유로움, 일을 잘못한다고 대통령과 정부를 비판해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 민주주의 국가에 사는 내가 20년 전 이곳 남한으로 오길 백번 잘했다. 북한에서 설날에도 못 먹는 떡을 1년 내내 먹을 수 있고 명절에도 구경 못 하는 여유로운 표정을 매일같이 볼 수 있으니까. 내가 서울에서 보는 시민들의 순수한 꾸밈새는 거짓과 포장이 없는 진실의 그림이다. 이거야 말로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훈훈한 세상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휴전선이 가로막혀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그리운 고향을 마음에 그려본다. 하루빨리 70년 분단의 고통을 마무리하고 통일이 되어 반가운 얼굴들을 마주했으면 좋겠다. 민족의 고유 명절 설을 맞으며 고향에 계시는 사랑하는 부모·형제와 우리 동포들에게 새해에는 더 나은 생활이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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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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